녹았다 굳으며 물체 움켜쥐는 EPFL의 '터미네이터' 로봇 손

SF 영화의 한 장면이 현실로 튀어나왔습니다. 스위스 로잔 연방 공과대학(EPFL) 연구진이 물체의 모양에 맞춰 손바닥을 녹였다가 다시 굳힐 수 있는 혁신적인 로봇 손을 공개했습니다. 영화 ‘터미네이터 2’의 액체 금속 로봇 ‘T-1000’에서 영감을 받은 이 기술은 로봇 그리퍼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었습니다.

Jamie Paik 교수가 이끄는 EPFL 재구성 가능한 로보틱스 연구소(Reconfigurable Robotics Lab)에서 개발한 이 4지형 로봇 손은 로봇 공학계의 숙원 과제 중 하나인 ‘복잡하고 생소한 형태의 물체 완벽하게 쥐기’를 우아하면서도 파격적인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비결은 바로 **저융점 합금(LMPA, low-melting-point alloy)**에 있습니다. 비스무트, 인듐, 주석을 혼합한 이 특수 합금은 섭씨 60도(140°F)만 되면 액체 상태로 변합니다. 물체를 잡아야 할 때 내장된 가열 소자가 손바닥을 ‘흐물흐물한’ 상태로 만들고, 손가락이 물체를 감싸면 액체 금속이 물체의 굴곡에 맞춰 완벽하게 밀착됩니다. 이후 다시 냉각되어 단단하게 굳으면서 극강의 고정력을 확보하는 원리입니다.

이 설계의 백미는 영리한 열 관리 시스템에 있습니다. 냉각과 응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로봇 손 전체가 팔에서 분리되어 수조에 ‘담금질’되듯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시 단단해진 손은 로봇 팔에 결합되어 깨지기 쉬운 정밀 부품부터 자기 무게의 40배에 달하는 무거운 물체까지 거뜬히 들어 올립니다. 이번 연구는 세계적인 권위의 학술지 Science Robotics에 게재되며, 소프트 로보틱스와 기존 강성 로봇 설계의 장점을 결합한 로봇 공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기술이 왜 중요한가요?

이 ‘터미네이터’ 스타일의 로봇 손은 진정한 의미의 ‘범용 그리퍼(Universal gripper)‘를 향한 거대한 도약입니다. 지금까지의 로봇 손은 유연하지만 힘이 부족한 소프트 그리퍼와, 힘은 세지만 정교한 형태 대응이 어려운 하드 그리퍼 사이에서 늘 타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EPFL 팀은 상변화 물질을 활용해 무한한 적응력과 강력한 파워를 동시에 거머쥐었습니다. 이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수만 가지 상품을 다뤄야 하는 물류 창고는 물론, 고성능 의수 제작, 심지어 우주 공간에서 파편을 수거하는 정밀 미션에 이르기까지 로봇의 활동 영역을 획기적으로 넓힐 것으로 기대됩니다.